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몽골-타타르의 멍에 (문단 편집) === 결론 === >1237년 칭기즈 칸의 손자인 바투의 군대가 동슬라브인들의 땅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관례적으로 이 사건은 오래되고 쇠락했지만 한 때 번영했던 '키예프 루스'의 최종적인 멸망, '타타르의 멍에' 아래의 억압적인 암흑기의 시작으로서 두 시대를 가르는 대한 상징적 구분으로 쓰인다. 물론 이 관습이 완전히 부적절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지나치게 조잡한 것도 사실이다. (...) 대안에 따르면 몽골의 침공은 표면적으로는 충격적이었지만, 피상적이었으며 근본적인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연속성을 모호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13세기 루스의 변화는 몽골에 의해 가속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몽골이 주된 원인은 아니었다. >---- >Simon Franklin, “Eastern Europe (c) Rus',” in David Abulafia, ed., The New Cambridge Medieval History, Vol. 5 여기서 세 가지 주요 논의점이 발생한다. ||1) 정말로 모든 것이 퇴보된 암흑기인가? || ||2) 진보하거나 퇴보되었다면, 그것의 주요 원인이 [[몽골]]인가? || ||3) 러시아의 정치, 사회, 문화가 몽골의 직접적 영향 아래에서 변모했는가? || 결론만 말하자면 셋 다 아니다.전반적으로 바로 그 제정 시대 러시아 역사학자들에게도 오늘날의 '''중세 암흑기론'''과 비슷한 취급을 받는다고 보면 된다. 소위 '타타르의 멍에'라는 기간은 여러 요인들이 화학적 결합을 일으켜 폭발을 하고 거기에 맞춰 적응해나가는 시기였고 몽골-킵차크 칸국이 미친 영향이 크든 적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결국 그 요인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즉 몽골의 침공과 지배가 낳은 결과가 긍정적이었냐, 부정적이었냐 이전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몽골 자체가 딱히 본질적인 요인은 아니었다는 배경이다. '몽골의 지배를 받으면서 러시아는 유럽과 단절되어 낙후되었고 퇴보되었으며 러시아는 몽골적인 국가가 되었다'와 같은 단순한 인식은 이미 학계에서 사장된 지 오래다. 수백 년의 세월 동안의 체제를 일방적으로 정의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몽골 침공 직전 루스는 단순히 점진적인 쇠퇴기에 있었던게 아니라 이미 사회 붕괴 수준에 이르렀다. 연대기에 따르면 몽골 이전 13세기 초 노브고로드와 키예프 등지에서는 대기근과 전염병으로 수천명이 죽어나갔고 [[식인]]이 자행되었고 거리에서 행인을 공격했으며 귀족들은 땅과 재산을 버리고 도망쳤다. 이것은 타타르의 멍에라는 암흑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몽골이 아니다는 것을 말해주는 사실이다. 물론 몽골 침공과 지배는 여기에 치명타를 가했고 파멸적이었으며 당대 러시아인들은 그렇게 기록으로 남겼다. 그러나 아무리 강력하다 한들 전근대 국가인 몽골 군대가 거대한 루스 전체를 후퇴시키거나 유럽과 단절시키는건 불가능했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이 암흑기에는 대흉년, 전염병, 중앙정부 붕괴, 내란, 외적의 침입 등 여러 요인들이 모두 작용했다. 초창기가 '암흑기'라 할 만한 시기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일단 몽골이 주요원인은 아니었을 뿐더러 몽골을 비롯한 이민족 침공을 아예 겪지 않은 지역도 많았고 직격탄을 맞은 도시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회복했다. 또한 기존 체제가 붕괴되고 재편성되면서 이전에 붕괴된 스칸디나비아-동로마 교역망을 대신하여 유라시아 교역망에 연결되었으며 이로 인해 유럽과의 교류도 활발해졌으며 콘스탄티노플 함락으로 인해 로마인들이 대거 유입되었고 이탈리아, 스웨덴, 폴란드, 오스만 등 주변국가들의 다방면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러한 영향은 일부 근접 지방만이 아닌 루스 전체로 퍼져나갔다. 예를 들자면 [[https://en.wikipedia.org/wiki/Aristotele_Fioravanti|아리스토텔레 피오라반티]], [[https://en.wikipedia.org/wiki/Pietro_Antonio_Solari|피에르타 솔라리오]] 등의 이탈리아 건축가들이 러시아에서 크렘린과 성당을 건설하면서 건축술에 영향을 주었고 이 영향으로 신성로마제국의 외교관 [[https://en.wikipedia.org/wiki/Sigismund_von_Herberstein|지그문트 폰 헤르베르슈타인]]은 모스크바를 두고 '이탈리아 같다'고 썼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서 러시아에 대한 책과 글들을 남겼는데 이는 결국 당대 서유럽인들이 러시아를 서구적이라고 인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헤르슈타인 이후 몇십년 뒤에 그리스 출신 [[수도자]]이자 학자인 [[https://ko.wikipedia.org/wiki/%EB%A7%89%EC%8B%AC_%ED%8A%B8%EB%A6%AC%EB%B3%BC%EB%A6%AC%EC%8A%A4|막심 트리볼리스]]는 러시아 교회와 정부에서 지지세력을 만들고 '슬라브의 후진성'을 지적하고 [[제3의 로마|비잔틴 문화의 우월성과 러시아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러시아의 '라틴적', '유대교적' 요소들을 비판하였고 또한 당시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튀르크리|오스만 풍습과 의복양식이 유행]]하고 있다는 것을 개탄하는 기록을 남겼다. 한국의 경우 [[원 간섭기]]라는 거의 비슷한 시기가 있기에 비교가 쉬운 편이다. 고려의 경우 지리적으로 폐쇄적인 반도국가이고 훨씬 영토가 작기에 원-고려 관계나 영향이 그 시대의 유일무이한 주된 요인이 될 수 있지만 러시아는 더 개방적이고 거대했기에 몽골 요인이 아무리 크다 한들 그것 단독으로 주된 요인이 될 수 없다는 것. 오히려 러시아의 몽골적, 아시아적 특성들을 강조하는 학자들조차 그 원인은 타타르의 멍에가 아니라 그 이전의 [[하자르 칸국]]이나 이후의 러시아에게 정복당한 칸국들, [[오스만 제국]]에 더 초점을 맞춘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오스만 제국도 튀르크계 유목민들로부터 세워진 나라고, 이들 역시 몽골의 영향력과 관련 없는 이들이 아니므로 러시아가 몽골의 영향을 받았다는게 틀린 말은 아닐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이웃의 이웃의 이웃(...)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어떻게든 몽골의 영향을 받았다는 가능성을 찾는건 진위여부와 별개로 의미없고 지나친 비약이다. 사실 굳이 저렇게 오스만의 영향을 강조하는 학자들의 주장도 러시아뿐만 아니라 근동-발칸-동유럽의 권역의 모든 국가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했다는 것에 가깝다. 그러나 결국 이마저도 타타르의 멍에 이후의 일이니 진위여부가 어찌되는 상관없는 내용이다.] 즉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의외로 러시아의 튀르크적 영향 혹은 요소들은 바로 그 [[키예프 루스]]가 형성되면서부터 존재했던 것이고 설령 몽골이 그 중에서 큰 지분을 차지한다 한들 새로운 기준점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엄연히 폴란드 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인 [[요가일라]]조차도 칸에게 조공을 바치고 야를릭을 받았으며[* 물론 이는 폴란드 본토나 리투아니아 서부가 아닌 대게 리투아니아 동부나 정복한 땅(대게 현재의 우크라이나 서부에 해당하는 땅)에 한해서였다.], 이는 훗날 킵차크 칸국이 멸망한 후에 16세기 초에 [[크림 칸국]]까지 이어진다. 때문에 어떤 면에서 보자면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러시아보다 더 오랫동안 타타르의 멍에 상태에 놓여있었다'''는 것. 즉 '루스 서부는 리투아니아의 지배를 받았고, 동부는 킵차크 칸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기에 양측이 갈라졌다'는 내러티브가 잘못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골 및 킵차크 칸국의 폴란드에 대한 영향력에 대한 대중적 인식은 없다시피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